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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상의 하대상면(下臺上面)에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의해 조선 연산군 14년(1501)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건칠불(乾漆佛)이다.
건칠불은 옻칠을 입힌 종이
부처님이다.
보살상의 머리에는
상투를 올리고 그 위에 따로 만들어진 2단 구조의 보관을 썼는데, 관의 표면에는 아름다운 당초문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둥글고 풍만한얼굴에다 눈, 코,
입등이 단아하게 묘사되어 보살의 특징있는 얼굴을 만들어 준다.
귀는 짧고 목에는 삼도가 없다. 자세는 왼손을 대좌에 짚고, 바른 다리는 대좌
아래로 내린 반가좌이다.
어깨는 좁지만 가슴은 당당한 편이며 ,천의는 양어깨를 내려와 대좌 아래까지 흐르고 상의자락 역시 다리에서 그냥 아래로
내려온다.
대적광전은 기림사의 본전으로 신라 선덕여왕 때 처음 지어졌으며 그 뒤 8차례나 다시 지어졌다.
1997년 해체공사 때 종도리에서 4종의 묵서가 발견되었다.
이 묵서에 의하면 1629년 제5차 중수가 있었고, 1755년 개조중수가 있었고, 1785년에 6차 중창이 있었으며, 1978년에 제7차 중수가 있었다.
최근 1997년에는 정부의 문화재 수리비용으로 제8차 완전 해체 수리가 이루어졌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배흘림 기둥의 다포식 단층 맞배지붕이 단정하다.
겉모습은 본전 건물다운 웅장함을 갖추었으며, 내부는 넓고 화려하여 장엄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전면에는 모두 화려한 꽃창살 문을 달았는데 색이 바래 화려한 꽃창살 조각의 느낌이 포근히 전해진다.
넓은 전각 안은 장엄한 맞배식 건물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며, 단청이 퇴색하여 느낌이 더 고색 창연하다.
대적광전은 주불이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이다. 적(寂)은 번뇌를 멸한 고요한 진리의 세계, 니르바나의 세계를 말하며, 광(光)은 그 세계에사 나오는 참된 지혜가 온 우주를 찬란히 비춘다는 것을 말한다.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승려 광유가 창건하여 임정사(林井寺)라 부르던 것을 원효대사가 기림사로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다. 기림사 대적광전에 모셔진 불상인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은 향나무로 틀을 만든 뒤 그 위에 진흙을 발라 만든 것이다.
중앙에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좌우에 약사(藥師)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협시로 배치한 형태이다. 근엄하면서도 정제된 얼굴, 양감이 풍부하지 않은 신체의 표현, 배부분의 띠로 묶은 옷 등에서 16세기 초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된다.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불 복장의 전적 유물은 사경(寫經)과 목판본(木版本) 등 일괄 54건 71책이다.
사경은 고려 충목왕(忠穆王) 4년(1348)으로 추정되는 『상지은니대반야경(橡紙銀泥大般若經)』 권 210 등 10첩(帖)이 확인되었고, 목판본은 고려 숙종연간(肅宗年間, 1096∼1105)에 조성된 목판에서 13세기 초반 인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방광불화엄경』 권26(大方廣佛華嚴經 卷二十六)을 비롯하여 고려말 인출본과 조선 초기 인출본 그리고 연산군 6년(1500) 합천(陜川) 봉서사(鳳栖寺)에서 판각 인출한 『선종유심결(禪宗唯心訣)』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장정 형태도 조선시대에 상당수 확인되는 선장본(線裝) 외에 고려 사경(高麗寫經)에서 많이 확인되는 첩장본(帖裝本)과 흔하지 않은 장정 방식인 호접장본(胡蝶裝本)과 포배장본(包背裝本) 등이 골고루 확인된다. 호접장본으로는 고려 충선왕 1년(1309)에 새겼던 목판에서 공민왕 19년(1370)에 다시 인출(印出)한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권 4∼7, 8∼9 그리고 중국 송(宋)에서 만들어진 목판(木板)에서 고려말 인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방광물화엄경소(대방광불화엄경소)』 권97 등이 있다.
한편 포배장본으로는 고려말 인출된 것으로 보이는 『대방광원각약소주경(大方廣圓覺略䟽注經 )』 권상2, 『법화삼매참조선강의(法華三昧懺助宣講儀)』 권하 등이 있다.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불 복장의 전적 유물은 고려시대 조성되었던 은자대장경(銀字大藏經)의 실례를 보여주며, 고려시기 판각(板刻)되었던 목판의 인출과 다양한 장정(裝訂)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 사경과 여러 목판본에서 확인되는 조성 목적과 조성 시기와 장소 그리고 관여했던 인물 등에 대한 다양한 정보는 조성 당시의 역사상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이 불화는 기림사 대적광전의 후불탱화로 봉안되어 있는 비로자나삼불회도로서, 중앙에 비로자나불회도 중심으로 왼쪽에 약사불회도, 오른쪽에 아미타불회도가 배치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에 많이 조성된 삼불회도는 석가모니불화(중앙)·약사불화(좌)·아미타불화(우)로 구성된 삼세불화와 비로자나불화(중앙)·노사나불화(좌)·석가모니불화(우)로 구성된 삼신불화가 일반적이지만 이 불화에서는 비로자나불화와 아미타불화, 약사불화로 이루어져 있어 삼세불화와 삼신불화를 결합한 독특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중국 남송대부터 나타난 형식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기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등 16세기 불상에서 이미 확인되고 있지만, 불화 중에서 기림사 불화가 가장 이른 시기의 예에 속하기 때문에 자료적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이 삼불회도는 전반적으로 한 화면에 많은 존상을 배치하고 있는데, 중앙의 주불을 중심으로 점차 화면의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상승하면서 높은 존격에서 낮은 존격으로 배치하고, 인물의 표현도 점점 작아지게 하여 화면에서 원근감과 입체적인 공간감을 살리고 있다. 색채에서 후대에 일부 개채의 흔적이 보이지만, 황토색의 바탕에 홍색·녹색·노란색·하늘색·초록색 등이 적적하게 조화를 이루어 부처님의 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 불화는 천오(天悟)·금명(錦明)·최훈(最熏)·적조(寂照)·지순(智淳)·조한(祖閑)·임한(任閑) 등의 화원이 참여하여 1718년(숙종 44)에 그렸는데, 천오와 임한은 18세기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화승들로 기림사 불화의 진가를 짐작케 한다.
대적광전과 진남루 사이 서쪽에 오백나한전이 있고 바로 그 앞에 높이 3m 쯤 되는 아담한 3층석탑이서 있다. 감은사 탑과 같은 돌인 안산암(安山岩)으로만들었는데, 2중의 기단 위에 3층으로 몸체 돌과 지붕돌을 쌓았고 그 위에 노반, 복발, 앙화까지 남아 있다. 아랫기단은 낮은데, 한 면에 3개씩의 기둥모양이 새겨져있고 , 위 기단은 높은데 각 면마다 기둥 셋이 새겨져있다. 몸체 돌에는 층마다 모서리 기둥을 새겼는데, 아래는 굵게, 위는 좁게 나타내는 엔타시스(배흘림) 양식이다. 처마 끝은 4단으로 돼있다. 크기도 작지만 , 기단의 기둥수, 처마 받침의 단수가 줄어들어 ,통일 신라의 일반형이이면서 ,시대 말기 것으로 보인다. 석탑 동쪽의 보리수밑에는 목탑(木塔)터가 남아 있다. 언젠가 목탑이 소실되고 난 뒤 재건하지 못하고 ,대신 자그마한 석탑을 세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백나한상을 모신 건물로 전면 5칸, 측면 2칸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장대석 1단의 얇은 기단 위에 화강석 주초를 놓고 전 후면에는 두리기둥을, 측면에는 각진기둥을 세웠는데 후면의 기둥은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동바리를 하였다. 공포는 내외 2출목이다. 내부 살미의 형태는 주심포에다 교두점 차단과 양봉이 주간포에는 교두점 차단과 삼분도 요두(要頭)를 각각 얹었다. 가구는 5량가이며 대량과 종량위에는 파련대공을 세웠다. 천장은 빗반자를 치고 단청을 하였는데 천장 전체가 빗반자로 된 경우는 드물다. 바닥은 우물 마루를 깔았으며 문비 구성은 전면 각칸에 이분합(二分合)교살문을 달았다. 이러한 형태를 볼 때 관룡사 대웅전의 모양과 흡사한 조선중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2002년 4월 개분불사를 하는 중에 오백나한 복장에서 조성당시에 씌여진 것으로 보이는 발원문이 나왔다. 여기에 보면 조성년도가 옹정7년(擁正七年)이다 서기로는 1729년이고 우리나라 연호로는 영조5년이다. 불상조각에 참여하신 분은 금산사 스님 4분과 본사스님 3분이다. 오백아라한은 정확히 526분의 성자이다. 부처님 당시의 제자들 중에 가장 뛰어난 10대 제자, 16성중(聖衆)과 500성중(聖衆)이다. 모든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간 최고 단계에 있는 사람이다. 아라한에 관한 설명은 다음의 법구경에 나온 게송으로 알 수 있다.
진남루는 남방을 진압한다는 뜻으로 여기서 남방은 일본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당시 기림사는 전략요충지로서 경주지역 의병과 승병 활동의 중심 사원이었으며, 이 지역 다른 사원과 달리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경주부 관아에 보관되어 있던 [영부안선생]이나 [호장안]등 수많은 문헌들은 당시 호장 최락에 의해 기림사로 옮겨져 잘 보관 된 결과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됐다. 이때 이 진남루는 승군의 지휘소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건물 형태는 익공계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상부 구조 수법이 돋보이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정면 3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약사전은 동방 만월 세계에서 중생 교화를 맡고 계신 약사 여래불을 모신 전각이다. 사람의 병을 고치고 , 번민에서 구제하시는 부처님으로 약사유리광여래불(藥師琉璃光如來佛),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 한다. 보살로서 수행하고 있을 때에 12대원(大願)을 발했다고 한다. 중생의 병을 제거하며, 모든 감각기관을 완비시켜 해탈로 인도하는 능력이 있다. 일광(日光)보살, 월광(月光)보살을 각각 좌우 협시(脇侍)로서 약사삼존(藥師三尊)으로 삼으며, 권속에는 호법신(護法身)으로서의 12신장을 모신다.
치미란 전통 건축의 용마루 양끝에 부착한 대형 장식 기와를 말하는 것으로, 주로 점토로 만들어졌다. 기림사 석조 치미는 점토로 된 기와가 아닌 돌로 이루어진 것으로 희귀한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파손된 부분이 많은 편으로 현재 총 길이 95cm, 너비 70cm만 남아 있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금고는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도구로서, 주로 공양시간을 알리거나 대중을 불러 모을 때 사용된다. 보통 청동으로 만들고 북처럼 가운데 부분을 쳐서 소리를 내는데 반자라고도 한다. 기림사 금고는 직경 70cm, 두께 11.5cm, 뒷면의 내구직경 56cm의 크기로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금고 뒷면에는 명문이 있어 조선 경종 2년(1722)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고 앞면에는 범자와 꽃문양이 새겨져 있고 상부와 좌우에 걸어둘 수 있도록 고리가 달려 있다.
놋쇠로 만든 한국 특유의 취악기로 쇠붙이의 긴 대롤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 세 토막의 짧은 관을 끼워 연결시켰다. 취구쪽은 가늘고, 끝 부분으로 갈수록 차차 굵어지면서 맨 끝은 나팔꽃 모양으로 퍼지게 만들었다. 고대 중국의 나발과 비슷한 점으로 미루어 중국에서 들어온 악기인 것만은 확실하나, 문헌이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지공이 없어 한 음 밖에 낼 수 없지만 금속성의 우렁차고 호쾌한 음색을 가지고 있으며, 취구에 댄 입술로 음의 강약과 고저를 조절한다.
불전은 부처님을 모시는 공간으로서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의례와 수행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일찍이 사부대중의 수행과 신행을 위한 다양한 불전장엄구들을 조성하였다. 이 가운데서도 패는 부처를 상징하는 법구로서 고대부터 꾸준히 성행해 온 대표적인 불전장엄구이다. 패는 점자 다변화되는 의식. 작법과 용도로 인해 다양한 종류로 분화되며 조선시대로 이행되었다. 조선시대는 불교 패가 가장 활발히 성행한 시기로 이 시기의 패는 사용방식에 따라 세워두는 입형과 걸거나 손에 드는 괘형의 구조로 구분된다. 입형 불교 패로는 불교존상들의 명호를 명시한 불패와 왕실의 무량수복을 비는 전패가 있다. 이들은 예경의 대상으로서 불단이나 의식단에 봉안되어 의례의 주요법구로서 인식되었다. 그렇지만 현재는 국가나 불교의 융성을 축원하는 문구로 교체되어 원패로 변용되어 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괘형 불교 패는 법구경이나 게송들의 문구를 적은 패로 전각의 내부기둥에 걸어 불도로 나아가기 위해 정진하고자 하였다. 더불어 수륙재와 같은 야외의례에서는 사부대중이 성불도로 나아가고자 하는 바람을 담아 스님들이 손으로 들고 의식에 사용되었다. 현재 기림사에는 조선후기에 조성된 입형과 괘형의 불교 패들이 모두 확인되어 당시 의례가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짐작케 하며, 뛰어난 조각 기법을 통해 발현된 패들의 조형미는 불교목공예의 정수를 잘 보여 준다.
1권 1책. 목판본. 전체가 도표로 되어 있다. 그 도표는 석가모니 이전의 과거칠불(過去七佛)로부터 시작하여 석가모니 이후의 서천(西天, 인도) 28조(祖), 중국 6조 등 33조사를 차례로 열거하였다.
6조 혜능(慧能)으로부터 우리 나라 나옹(懶翁)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중심으로 삼고, 그 방계 및 분파의 법맥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이 법맥도에 의하면 혜능의 제6세에 임제(臨濟)가 나와서 임제종을 창설하였고, 임제 후 제18세에 단애(斷崖)가 있으나, 제17세 고봉(高峰)의 문하에서 급암(及庵)이 나오고 급암에서 평산(平山)과 석옥(石屋)이 나왔다.
이들 중 평산의 법을 나옹이 이었고 나옹의 법을 무학이 이어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조선 중기의 고승 도안(道安)이 석옥의 법을 보우(普愚)가 잇고 그 법맥이 서산대사(西山大師)인 휴정(休靜)에게 이어졌다고 한 것과 함께 우리 나라 불교 법맥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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